김기영 (영화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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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기영은 1919년 서울에서 태어나 1998년 사망한 대한민국의 영화 감독이다. 의과대학 졸업 후 영화계에 입문하여, 초기에는 멜로 영화를 연출했으나, 1960년 영화 《하녀》를 통해 독창적인 스타일을 확립하며 한국 영화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그는 표현주의적인 연출, 여성의 심리를 다룬 작품들로 유명하며, 《하녀》를 포함한 '여성 3부작'과 《충녀》, 《육식동물》 등 문제작들을 만들었다. 1970년대 이후 정부의 검열과 어려움 속에서도 B급 영화 스타일의 작품을 제작하며 독자적인 영화 세계를 구축했다. 김기영은 생전에는 컬트 영화 팬들에게 재발견되었으며, 사후에도 박찬욱, 봉준호 등 많은 영화 감독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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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영 (영화 감독)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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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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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김기영 |
로마자 표기 | Gim Giyeong |
한자 표기 | 김기영(金綺泳) |
출생일 | 1919년 10월 10일 |
출생지 | 일제강점기 조선 경성부 익선동 |
사망일 | 1998년 2월 5일 |
사망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동 |
국적 | 대한민국 |
학력 | 서울대학교 |
직업 | 영화 감독, 영화 각본가, 영화 제작자, 영화 편집자 |
활동 기간 | 1955년 – 1990년 |
배우자 | 김유봉 (1998년 2월 5일 사망) |
수상 | 청룡영화상 감독상 (1971년) 백상예술대상 감독상 (1973년) |
주요 작품 | |
대표작 | 하녀 (1960년) |
2. 생애
김기영은 1919년 서울에서 태어나 평양에서 성장했다. 어릴 때부터 예술적 재능을 보였으나 의학을 공부하려 했다. 일본 유학 후 연극과 영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한국으로 돌아와 연극 활동을 하다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을 졸업했다.[3][1][4]
한국 전쟁 중에는 부산으로 피난하여 오영진의 도움으로 주한 미국 공보원에서 일하며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었다.[12] 이 경험을 바탕으로 1955년 첫 상업 영화 《죽음의 상자》를 연출했고, 같은 해 《양산도》로 성공을 거두었다.[14] 이후 멜로드라마에서 사회 비판적인 영화로 방향을 전환했다.[12]
1960년 4·19 혁명 이후 대한민국 제2공화국 시기에 제작된 《하녀》는 김기영의 대표작이다. 성적 욕망과 계급 갈등을 파격적으로 다루며 표현주의적인 연출을 선보였다.[22] 이후 《고려장》 등 독창적인 작품들을 발표하며 작가주의 감독으로 자리매김했다.[13]
1970년대에는 정부의 검열 속에서도 《화녀》, 《충녀》 등 B급 영화 스타일의 작품들을 통해 독자적인 영화 세계를 구축했다.[31] 1980년대에는 활동이 뜸했지만, 1990년대에 그의 작품이 재조명되면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43] 1998년 화재로 사망하기 전까지 신작 영화를 준비 중이었다.[9][8] 사후에도 그의 영화는 꾸준히 재평가되고 있으며, 박찬욱, 봉준호 등 후배 감독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47][48]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1919-1950)
김기영은 1919년 10월 10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교동(현재의 경운동)에서 소학교 교사인 아버지 밑에서 태어났다.[3][1][4] 그의 가족은 서울에서 여러 대를 거쳐 살았으며, 할아버지는 광화문의 수문장이었다.[5] 아버지 김석진은 영어 교사였고, 어머니 한진초 또한 교사이자 경기여자전문학교 졸업생으로, 두 분 모두 취미로 그림을 그렸다.[5] 김기영은 외아들이었고, 두 명의 누나가 있었다. 누나들은 각각 서울대학교에서 미술을, 이화여자대학교에서 무용을 전공하며 어린 김기영의 창의성을 북돋아 주었다.[6]1930년 가족은 평양으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10년간 머물렀다.[5] 김기영은 평양고등보통학교(평양제2고보)에서 음악, 회화, 문학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고, 학구적인 성격으로 "물리학 교수"라는 별명을 얻었다.[7] 학생 시절, 그의 시가 일본 신문에 게재되기도 하고, 그림 대회에서 1등을 수상하기도 했다.[8]
이러한 예술적 재능에도 불구하고, 김기영의 주된 관심사는 의학이었다. 1940년 고등학교 졸업 후 의과대학 입학을 지원했으나 실패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유학하며 의과대학 재입학을 위한 돈을 모으려 했다.[9] 이때 연극과 영화는 그의 평생의 관심사가 되었다. 김기영은 종종 교토에 가서 많은 연극 공연을 관람하고 다양한 국제 영화를 보았다. 특히 요제프 폰 슈테른베르크의 ''모로코''(1930)와 프리츠 랑의 ''M''(1931)은 그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었으며, 훗날 그의 영화 스타일에 영향을 주었다.[6]
1941년 김기영은 한국으로 돌아와 치과의사가 되려던 처음 계획과 달리 연극 연구에 몰두했다. 고대 그리스 연극, 헨리크 입센, 유진 오닐에 특히 관심을 가졌다.[10] 1945년 이전, 김기영은 일본군 징집을 피하기 위해 잠시 일본으로 돌아갔다.[5] 이후 평양으로 돌아와 "작은 난초"라는 극단을 창단하고 콘스탄틴 스타니슬라브스키의 연기 이론을 연구했다.[6] 1946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하여 1950년 치과학을 전공으로 졸업했다. 대학 재학 중에도 연극 활동은 계속되어, 1949년 국립대학교극단을 창단하여 입센의 ''유령'', 카렐 차페크의 ''로봇'',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과 안톤 체호프, 오닐의 작품 등 서구 연극 작품들을 무대에 올렸다. 이때 함께 작업한 주요 여배우는 김유봉으로, 훗날 그의 아내가 되었다.[12]
2. 2. 영화계 입문과 초기 경력 (1950-1960)
김기영은 한국 전쟁이 발발했을 때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인턴이었다. 그는 북한군이 후퇴한 날인 1951년 6월 1일 부산으로 갔다.[12] 부산에서 김기영은 평양고등보통학교 동문인 오영진을 만났다. 훗날 인기 영화인 《시집가는 날》(1956)의 각본을 쓴 오영진은 공보처를 통해 한국 뉴스의 뉴스릴을 제작하고 있었고, 김기영이 이 조직에서 시나리오 작가로 일자리를 얻도록 도왔다. 오영진의 도움으로 김기영은 주한 미국 공보원 진해에서 일자리를 얻었다.[12] 이 직업은 여러 면에서 김기영의 삶을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미국 공보원에서 받은 급여가 인상되면서, 그는 1951년 김유봉과 결혼할 수 있었고,[6] 1952년에 첫 아들 김동원을, 1955년에 딸을, 1958년에 둘째 아들 김동양을 낳았다.[5] 두 사람은 남은 생애 동안 결혼 생활을 유지했다. 김유봉은 치과 진료를 통해 남편의 영화 경력을 뒷받침하며 당시 한국 영화 제작자들 사이에서 그가 개인적인 비전을 추구할 수 있는 독특한 독립성을 부여했다.[13]김기영은 미국 공보원을 위해 《해군 일기》, 《나는 트럭이다》 등 약 20편의 다큐멘터리 영화를 "자유 뉴스"라는 이름으로 촬영했다.[6][10] 후자는 미국 국무부로부터 상을 받았다.[12] 김기영은 미국 공보원을 위해 이 선전 뉴스릴을 제작하면서 얻은 훈련과 장비를 통해 첫 상업 영화인 《죽음의 상자》(1955)를 연출할 수 있었다.[6] 이 데뷔작을 만들기 위해 미국 공보원에서 사용 기한이 만료된 필름 재고와 수동으로 작동하는 영화 카메라를 사용했는데, 이 영화는 전쟁 고아에 대한 반공주의 멜로드라마였다.[14] 현재는 유실된 이 영화는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의 양식을 따랐으며, 동시 녹음을 사용한 최초의 한국 영화였다.[6][15]

이 첫 영화의 성공으로 김기영은 두 번째 장편 영화인 역사 시대극 《양산도》(1955)를 연출할 수 있었고, 이 또한 미국 공보원에서 얻은 조악한 장비를 사용했다. 김기영은 어머니에게서 배운 전통적인 노래를 바탕으로 영화를 만들었다고 주장했지만, 이야기의 정확한 출처는 발견되지 않았다. 감독이 직접 이야기를 지어낸 것으로 추정되며, 최근 이규환이 리메이크하여 큰 성공을 거두며 한국 영화의 부활을 자극했던 《춘향전》과 같은 전통적인 이야기를 모델로 삼았다.[16] 이규환의 《춘향전》에 이어 《양산도》는 1955년 한국 영화 중 두 번째로 성공적인 작품이었다.[17] 대중적인 성공에도 불구하고, 당시 평론가들은 《양산도》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았다. 유두연은 이 영화를 "저속한 작품"이라고 평했고, 허백년은 "한국 영화의 품위를 떨어뜨린다"고 말했다.[15] 1950년대에 김기영이 연출한 유일하게 현존하는 영화인 《양산도》는 그의 초기 경력을 상당 부분 보여준다.[18] 당시 한국 영화 평론가들이 현실주의를 중요하게 여겼던 시대에, 현재는 유실된 《양산도》의 결말 부분에서 두 명의 죽은 연인이 빛줄기를 타고 하늘로 승천하는 장면은 혹평을 받았다. 오늘날 평론가들은 김기영의 후기 경력을 미루어 볼 때, 이 삭제된 장면이 환상에 대한 관심과 영화 장르의 충돌 등 김기영의 성숙한 스타일의 가장 특징적인 면모를 보여준다고 생각한다.[15][19] 김기영의 후기 작품에서 깊이 탐구될 다른 모티프들도 《양산도》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특히 닭을 다산과 성적 매력을 나타내는 이미지로 사용하는 등 동물 이미지가 그러하다.[20]
1956년 김기영은 김기영 프로덕션을 설립하고,[5] 당시 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영화 장르인 멜로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6] 그의 첫 독립 제작 영화는 《애정의 조건》(1956)이었다. 1957년 김기영은 용산구의 홍등가 근처에 살았고, 이 동네의 분위기는 그의 영화 《여자의 전쟁》과 《황혼열차》(둘 다 1957년)에 영향을 미쳤다.[5] 《첫 눈》(1958)을 통해 김기영은 멜로 영화에서 사회 의식이 있는 현실주의로 전환했다. 이 스타일을 따라 《13세의 반항》(1959)과 《슬픈 목가》(1960)가 제작되었다.[12] 《13세의 반항》은 김기영의 초기 작품 중 가장 성공적이고 존경받는 작품 중 하나였으며, 그는 이 영화 상영을 위해 1960년 샌프란시스코 국제 영화제에 참석했다.[21]
1960년은 대한민국에게 매우 중요한 해로, 민간인에 의한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종식되었다. 1962년에는 또 다른 군사 독재자인 박정희가 집권하여 거의 20년 동안 대한민국을 통치하게 된다. 이 두 정권 사이의 짧은 상대적 자유 기간은 제2공화국으로 알려졌다. 이 기간 동안 영화 제작자들은 영화 산업에 대한 정부의 통제가 완화된 것을 이용하여 몇몇 대담하고 실험적인 작품들을 만들었다. 유현목 감독의 영화 ''오발탄''(1960)도 이 시기에 만들어졌으며, 김기영 감독의 주요 대표작인 ''하녀''(1960)도 이 시기에 제작되었다.[22] 기괴한 집을 배경으로 성적 집착, 살인, 쥐를 소재로 한 섬뜩하고 표현주의적인 멜로드라마인 이 영화는 김기영의 성숙한 스타일이 완전히 드러난 첫 번째 작품이며, 역대 최고의 한국 영화 중 하나로 널리 알려져 있다.[2][6]
이 영화는 성적으로 포식적인 팜므 파탈의 등장으로 한 가족이 파멸하는 과정을 그린 가정 스릴러이다. 한 작곡가가 아내와 두 자녀와 함께 2층집으로 이사한다. 아내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미싱으로 일하다가 지쳐가자 작곡가는 집안일을 돕기 위해 하녀를 고용한다. 새 하녀는 이상한 행동을 보이며, 손으로 쥐를 잡고, 작곡가를 훔쳐보고, 그를 유혹하고, 결국 그에게 임신한다. 작곡가의 아내는 하녀가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낙태하도록 설득한다. 이 사건 이후 하녀의 행동은 점점 더 이상해진다. 그녀는 작곡가의 아들을 죽이고, 작곡가에게 쥐약을 먹고 함께 자살하도록 설득한다. 영화는 작곡가가 아내와 함께 신문에서 이 이야기를 읽는 것으로 끝난다. 이 영화의 내러티브는 작곡가가 말한 것으로 보이며, 그는 영화 관객들에게 이런 일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고 경고한다.[2][23][24]
''하녀''는 당시 한국 영화의 주된 스타일이었던 사실주의에서 벗어나 김기영만의 표현주의로의 전환을 보여주는 작품이었다.[12] ''하녀''에서 제시된 줄거리, 주제, 심지어 등장인물의 이름까지 김기영은 이후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재현했다. 이 첫 번째 영화 외에, 공식적인 "하녀 3부작"은 ''화녀''(1971)와 ''화녀 '82''(1982)로 구성되어 있다.[25] 또한, 적어도 두 편의 다른 영화들—''충녀''(1972)와 ''육식동물''(1985)—은 어떤 면에서는 ''하녀''의 리메이크작이다. 김기영은 이 이야기를 템플릿으로 사용하여 시나리오의 다양한 측면을 강조하고, 각 새로운 재해석마다 중심 상황의 다른 세부 사항과 측면에 집중할 수 있었다.[13]
2. 3. 《하녀》와 작가주의 (1960-1970)
김기영은 《하녀》 이후 한국 영화계에서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스타일을 탐구하고 장르를 혼합한 두 편의 영화를 더 연출하며 영화적 사실주의와의 결별을 굳혔다.[12] 《갯마을》(1961)은 반일 제2차 세계 대전 영화라는 틀을 넘어 인간성, 가학, 탐욕, 권력욕, 성욕을 독특하게 탐구하는 작품으로 거듭났다.[26] 이 영화의 흥행 성공으로 김기영은 서울 남산동에 첫 집을 살 수 있었다.[9] 《고려장》(1963)은 김기영과 자주 비교되는 영화감독 이마무라 쇼헤이의 영화 《나라야마 부시코》(1983)와 비슷한 주제를 다루었다.[13] 김기영의 영화는 장르 혼합이 특징인데, 늙은이를 버리고 죽게 내버려 두는 고대 전통을 다루는 이야기를 산아 제한에 대한 현대적 강연 안에 담아낸 것이 그 예이다.[27]이 세 편의 영화에서 처음 나타난 김기영의 성숙한 스타일의 특징은 고딕적 과장, 초현실주의, 호러, 변태성, 성행위 등이다.[28] 이는 당시 한국 영화의 전형적인 사실주의, 조화, 균형, 감상주의와는 정반대였지만, 김기영의 영화는 기이하고 은유적인 방식으로 전후, 산업화되는 한국 사회와 심리학의 현실을 다루었다. 김기영은 이 영화들을 통해 작가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한 후, 1960년대 후반 영화에서는 그의 독특한 비전이 약해지기 시작했다.[29]
1970년대 동안 한국 영화 산업은 정부의 검열과 자금 부족으로 인해 침체기에 있었다. 한국 영화 산업의 열악한 상황으로 인해 1960년대의 정점을 찍은 이후 한국의 영화 관람객 수는 급격히 감소했다.[30] 그러나 김기영은 B급 영화 스타일의 장르 영화를 독립적으로 제작하면서 이 시기에 가장 혁신적이고 개인적인 작품들을 만들기 시작했다.[31] 김기영은 《하녀》 3부작 중 두 번째 작품인 《화녀》(1971)를 통해 작가주의 정신을 완전히 되살렸다.[29] 특히 영화 속 인물들의 불안과 욕망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 빨간색과 파란색은 《하녀》의 어둡고 그림자진 흑백 촬영과는 차별성을 보였다.[32] 이 영화로 김기영은 청룡영화상에서 감독상을 수상했으며, 배우 윤여정은 시체스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 특별 언급을 받았다.[33][34] 평론가들에게 호평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김기영의 독립 제작 영화들은 정부의 과도한 간섭으로 대부분의 영화들이 피해를 입었던 이 시기에 흥행에도 성공했다. 1972년 김기영의 《충녀》는 서울에서 10만 장 이상의 티켓을 판매한 유일한 영화였으며, 1973년 백상예술대상에서 김기영에게 감독상을 안겨주었다.[35][36]
2. 4. 1970년대 이후와 말년 (1970-1998)
1982년의 불의 여자는 김기영이 이전에 여러 번 영화로 만들었던 '하녀' 3부작의 마지막 작품으로, 더욱 급진적이고 바로크적인 재해석으로 평가받는다.[10] 1980년대 중반까지 김기영의 영화 제작은 둔화되어 결국 중단되었다.1990년대 초, 김기영의 작품은 컬트 영화 팬들에 의해 재발견되기 시작했고, 인터넷을 통해 그의 영화에 대해 활발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국내 김기영 컬트 현상에 주목한 서울의 예술 영화관인 동숭아트센터는 김기영 영화 회고전을 기획했다.[43] 1997년 제2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김기영 회고전이 열리면서 그의 작품은 국제적인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김기영 작품에 대한 국제 관객들의 열광적인 반응은 영화제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으며, 해외 회고전 요청이 쇄도했다.[44] 김기영은 '악마적인 여자'라는 제목의 신작 영화를 제작하기 시작했고,[13] 베를린 국제 영화제는 1998년에 그의 영화 상영에 그를 초대했다.[45] 그러나 김기영은 영화 제작을 완료하거나 영화제에 참석하기 전인 1998년 2월 5일, 전기 합선으로 인한 화재로 부인과 함께 사망했다.[9][8]
김기영의 사망 이후에도 그의 영화에 대한 관심은 지속되었다. 1998년 샌프란시스코에서 두 차례 김기영 회고전이 열렸고,[13] 같은 해 베오그라드 국제 영화제, 런던 범아시아 영화제, 에스테 로마나, 파리 비데오테크에서 그의 영화가 상영되었다.[46] 1970년대 이전 한국 영화의 프린트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아 한때 김기영 작품의 90%가 유실된 것으로 간주되었으나,[10] "김기영 르네상스 프로젝트"를 통해 한국영화진흥위원회(KOFIC)는 김기영의 유실된 영화를 찾고 손상된 영화를 복원하는 노력을 기울였다.[40]
생전에 김기영은 젊은 세대의 한국 영화 감독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박광수 감독은 김기영을 가장 존경하는 감독으로 꼽았으며,[44] 이창호 감독 또한 김기영의 추종자로 알려져 있다.[40] 김기영의 영향은 임상수, 김기덕,[10] 봉준호[47], 박찬욱[48] 등 현재 한국 영화 감독들의 작품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3. 작품 세계
김기영은 한국 전쟁 당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인턴으로 근무하다 1951년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12] 부산에서 오영진의 도움으로 주한 미국 공보원에서 일하며 영화 경력을 시작했다.[12] 미국 공보원에서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면서 영화 제작 기술을 익혔고, 이를 바탕으로 첫 상업 영화 《죽음의 상자》(1955)를 연출했다.[6] 이 영화는 반공주의 멜로드라마로, 동시녹음을 사용한 최초의 한국 영화였다.[6][15]
두 번째 영화 《양산도》(1955)는 전통적인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시대극으로,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었지만 평론가들로부터는 "저속한 작품"이라는 혹평을 받았다.[15] 그러나 현재는 《양산도》의 삭제된 장면(두 연인이 빛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장면)이 훗날 김기영 영화의 특징이 되는 환상적 요소의 초기 모습이라는 평가를 받는다.[15][19] 또한, 《양산도》에서는 동물(닭) 이미지를 통해 다산과 성적 매력을 표현하는 등 후기 작품에서 나타나는 모티프들이 이미 등장하고 있었다.[20]
1956년, 김기영은 자신의 프로덕션을 설립하고 멜로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5] 《애정의 조건》(1956)을 시작으로, 《여자의 전쟁》, 《황혼열차》(1957), 《첫 눈》(1958) 등을 통해 사회 현실을 반영하는 멜로드라마를 선보였다. 《13세의 반항》(1959)은 그의 초기 대표작 중 하나로, 샌프란시스코 국제 영화제에 초청되기도 했다.[21]
3. 1. 주제와 스타일
김기영은 《하녀》 이후 한국 영화계에서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스타일을 탐구하고 장르를 혼합한 영화들을 연출하면서 영화적 사실주의와 결별했다.[12] 《갯마을》(1961)은 반일 제2차 세계 대전 영화라는 틀을 넘어 인간성, 가학, 탐욕, 권력욕, 성욕을 독특하게 탐구하는 작품이었다.[26] 《고려장》(1963)은 이마무라 쇼헤이의 영화 《나라야마 부시코》(1983)와 비슷한 주제를 다루었는데, 김기영의 버전은 장르 혼합이 특징적이었다. 그는 늙은이를 버리고 죽게 내버려 두는 고대 전통을 다루는 이야기를 산아 제한에 대한 현대적 강연 안에 담아냈다.[27]이 세 편의 영화에서 처음 나타난 김기영의 성숙한 스타일의 특징은 고딕적 과장, 초현실주의, 호러, 변태성, 성행위 등이었다.[28] 이는 당시 한국 영화의 전형적인 사실주의, 조화, 균형, 감상주의와는 정반대였지만, 김기영의 영화는 기이하고 은유적인 방식으로 전후, 산업화되는 한국 사회와 심리학의 현실을 다루었다.[29]
1970년대 한국 영화 산업은 정부의 검열과 자금 부족으로 침체기에 있었지만, 김기영은 B급 영화 스타일의 장르 영화를 독립적으로 제작하면서 이 시기에 가장 혁신적이고 개인적인 작품들을 만들기 시작했다.[31] 《화녀》(1971)를 통해 작가주의 정신을 완전히 되살렸으며,[29] 영화 속 인물들의 불안과 욕망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 빨간색과 파란색은 《하녀》의 어둡고 그림자진 흑백 촬영과는 차별성을 보였다.[32] 이 영화로 김기영은 청룡영화상 감독상을 수상했고, 배우 윤여정은 시체스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 특별 언급을 받았다.[33][34] 1972년 김기영의 《충녀》는 서울에서 10만 장 이상의 티켓을 판매한 유일한 영화였으며, 1973년 백상예술대상에서 김기영에게 감독상을 안겨주었다.[35][36]
독립 영화 제작자였지만, 김기영 역시 정부의 압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1975년에 《반금련》을 촬영했지만, 당시 상영이 금지되어 40분 분량이 검열된 채 1981년에 개봉되었다.[10] 정부는 또한 김기영에게 반공 선전 영화를 만들도록 강요했다. 그 결과물인 《혈맥》(1976)은 공산주의자를 김기영 특유의 《팜므 파탈》 캐릭터로 묘사함으로써 선전의 범위를 뛰어넘었다.[10] 김기영은 "북쪽이든 남쪽이든, 자본주의든 공산주의든, 이데올로기는 저에게 성별을 나누는 것보다 훨씬 덜 흥미롭습니다."라고 언급했다.[13]
영화 평론가이자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인 이용관은 《이어도》(1977)를 김기영의 최고 영화라고 평가했으며,[15] 버라이어티의 서울 특파원인 데이시 파켓은 이를 "인류를 움직이는 근본적인 힘을 묘사하는 한국 영화 중 가장 강렬하고 불안한 작품 중 하나"라고 칭했다.[38][39] 자연 환경, 종교, 사회적, 성적 금기를 탐구하는 이 영화는 사체애 장면으로 절정에 달한다.[38]
3. 2. '여성 3부작'
김기영은 《하녀》 이후 당시 한국 영화계에서는 획기적인 스타일을 탐구하고 장르를 혼합한 영화들을 연출하며 영화적 사실주의와 결별했다.[12] 1970년대 한국 영화 산업은 정부의 검열과 자금 부족으로 침체기에 있었지만,[30] 김기영은 B급 영화 스타일의 장르 영화를 독립적으로 제작하면서 이 시기에 가장 혁신적이고 개인적인 작품들을 만들기 시작했다.[31]김기영은 《하녀》 3부작 중 두 번째 작품인 《화녀》(1971)를 통해 작가주의 정신을 완전히 되살렸다.[29] 영화 속 인물들의 불안과 욕망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 빨간색과 파란색은 《하녀》의 흑백 촬영과는 차별성을 보였다.[32] 이 영화로 김기영은 청룡영화상 감독상을 수상했고, 배우 윤여정은 시체스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 특별 언급을 받았다.[33][34] 1972년 김기영의 《충녀》는 서울에서 10만 장 이상의 티켓을 판매한 유일한 영화였으며, 백상예술대상에서 김기영에게 감독상을 안겨주었다.[35][36]
평론가들의 호평을 받고 흥행에도 성공한 독립 영화 제작자였지만, 김기영 역시 정부의 압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1975년에 《반금련》을 촬영했지만, 당시 상영이 금지되어 40분 분량이 검열된 채 1981년에 개봉되었다.[10]
3. 3. 기타 주요 작품
김기영은 《하녀》 이후 획기적인 스타일을 탐구하고 장르를 혼합한 영화들을 연출하며 영화적 사실주의와 결별했다.[12] 《갯마을》(1961)은 반일 제2차 세계 대전 영화의 틀을 넘어 인간성, 가학, 탐욕, 권력욕, 성욕을 독특하게 탐구했다.[26] 이 영화의 흥행으로 김기영은 서울 남산동에 첫 집을 마련했다.[9] 《고려장》(1963)은 이마무라 쇼헤이의 《나라야마 부시코》(1983)와 비슷한 주제를 다루면서도, 장르 혼합을 통해 늙은이를 버리는 고대 전통을 산아 제한에 대한 현대적 강연 안에 담아냈다.[13][27]이 시기 김기영 영화의 특징은 고딕적 과장, 초현실주의, 호러, 변태성, 성행위 등이었다.[28] 이는 당시 한국 영화의 전형적인 사실주의와는 정반대였지만, 김기영의 영화는 전후 산업화되는 한국 사회와 심리학의 현실을 기이하고 은유적인 방식으로 다루었다.[29]
1970년대 한국 영화 산업은 침체기였지만, 김기영은 독립적으로 B급 영화 스타일의 장르 영화를 만들며 혁신적이고 개인적인 작품들을 선보였다.[30][31] 《화녀》(1971)를 통해 작가주의 정신을 되살렸고, 청룡영화상 감독상, 시체스 영화제 여우주연상 특별 언급을 받았다.[29][33][34] 《충녀》(1972)는 백상예술대상 감독상을 안겨주었다.[35][36]
김기영은 정부의 압력으로 《반금련》(1975)이 검열되고, 반공 선전 영화 《혈맥》(1976)을 만들기도 했지만, 이데올로기보다는 성별에 더 관심이 있다고 언급했다.[10][13]
《이어도》(1977)는 자연 환경, 종교, 사회적, 성적 금기를 탐구하며, 사체애 장면으로 절정에 달하는 강렬하고 불안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15][38][39]
4. 평가와 영향
영화 평론가 정성일은 김기영을 "단 한 마디로 괴인(怪人), 그 이전에 아무도 그렇게 영화를 만들지 않았고 그 이후에 누구도 그렇게 영화를 만들지 못했다"고 평가하였다. 배우 윤여정은 "예술가는 앞서가야 한다. 지금 봐도 쇼킹한데, 1970년대 우리나라에 규제가 심할 때 그런 영화를 만들었다"며 그를 "천재"로 묘사하였다. 영화 감독 박찬욱은 김기영을 "제게 가장 영향을 주는 감독 중 하나"라고 평가하였다.[59] 영화 감독 봉준호는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기생충⟫의 "가장 큰 영감은 김기영 감독님"이라고 밝혔다.[60]
김기영의 동료들은 그를 괴짜로 묘사했으며, 그의 파격적이고 비순응적인 성격은 그가 한국의 주류 영화 산업에 참여하는 것을 막았다.[41] 그럼에도 불구하고, 1960년대 초부터 김기영은 가장 위대하고 독창적인 한국 영화 감독 중 한 명으로 평가받았다. 그의 성, 공포, 멜로드라마에 대한 스타일리시한 집착은 김기영에게 그의 팬들로부터 "미스터 몬스터"라는 별명을 얻게 했다.[42]
1990년대 초 김기영의 작품은 컬트 영화 팬들에 의해 재발견되기 시작했고,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그의 경력이 조명되면서 국제 영화계에서 열광적인 새로운 관객을 찾았다.[44] 김기영의 작품에 대한 국제 관객들의 긍정적인 반응은 영화제 조직자들을 놀라게 했고, 그들은 즉시 김기영의 경력에 대한 해외 회고전 요청을 받기 시작했다.[44]
생전에 김기영은 젊은 세대의 한국 영화 감독들 사이에서 많은 지지자를 얻었으며, 그의 사망 이후에도 김기영의 한국 영화에 대한 영향은 임상수와 김기덕과 같은 감독들의 작품을 통해 나타나고 있다.[10] 봉준호는 김기영을 자신의 멘토이자 가장 좋아하는 감독이라고 불렀으며,[47] 박찬욱은 ''하녀''를 자신의 경력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영화 중 하나로 꼽으며, 김기영에 대해 "그는 파괴 속에서 아름다움을, 폭력과 공포 속에서 유머를 발견하고 묘사할 수 있다"고 말한다.[48]
5. 작품 목록
영화 제목[49] | 출연 | 비고[50] | 개봉일 |
---|---|---|---|
나는 트럭이다 | 다큐멘터리 단편 | 1953년 | |
애정의 보금자리 | 다큐멘터리 단편 | 1953년 | |
세 사공의 일기 | 다큐멘터리 단편 | 1955년 | |
주검의 상자 | 최무룡 강효실 | 반공 멜로드라마 김기영 감독의 상업영화 데뷔작 | 1955년 6월 11일 |
양산도 | 김삼화 조용수 | 역사 멜로드라마 김기영 감독의 1960년 이전 작품 중 유일하게 현존하는 작품 | 1955년 10월 13일 |
봉선화 | 나강희 안석진 | 역사 멜로드라마 김기영 프로덕션의 첫 번째 영화 | 1956년 11월 10일 |
여성전선 | 조미령 박암 | 멜로드라마 | 1957년 3월 1일 |
황혼열차 | 조미령 박암 | 멜로드라마 | 1957년 10월 31일 |
초설 | 김지미 김승호 | 멜로드라마 | 1958년 5월 30일 |
10대의 반항 | 황해남 엄앵란 | 멜로드라마 | 1958년 7월 16일 |
슬픈 목가 | 김석훈 김의향 | 멜로드라마 | 1960년 3월 24일 |
하녀 | 이은심 주증녀 | 한국 영화사상 가장 위대한 영화 중 하나로 여겨짐[2] | 1960년 11월 3일 |
현해탄은 알고 있다 | 김운하 공미도리 | 전쟁 멜로드라마 | 1961년 11월 10일 |
고려장 | 김진규 주증녀 | 1963년 3월 5일 | |
아스팔트 | 김진규 장동희 | 범죄 멜로드라마 | 1964년 4월 10일 |
병사는 죽어서 말한다 | 황정순 선우용녀 | 전쟁 드라마 | 1966년 1월 22일 |
여 | 신성일 문희 | 멜로드라마 | 1968년 12월 23일 |
미녀홍낭자 | 이순재 문희 | 초자연 호러 영화 | 1969년 8월 8일 |
렌의 애가 | 이순재 문희 | 낭만 문학 드라마 | 1969년 10월 16일 |
화녀 | 남궁원 윤여정 | 하녀 3부작 중 두 번째 작품 감독상: 청룡영화상 특별 언급 여우주연상: 시체스 영화제 | 1971년 4월 1일 |
충녀 | 윤여정 전계현 | 감독상, 남우주연상: 백상예술대상 | 1972년 7월 6일 |
파계 | 최불암 박병호 | 문학 각색 | 1974년 11월 9일 |
육체의 약속 | 김지미 이정길 | 멜로드라마 | 1975년 7월 26일 |
혈육애 | 김지미 이정길 | 반공 멜로드라마 | 1976년 10월 5일 |
이어도 | 이화시 김충렬 | 초자연적이고 환경적인 주제를 담은 문학 각색 | 1977년 10월 4일 |
흙 | 이화시 김충렬 | 문학 멜로드라마 | 1978년 3월 25일 |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 | 남궁원 김자옥 | SF/호러 멜로드라마 | 1978년 12월 2일 |
수녀 | 김자옥 이화시 | 문학 각색 | 1979년 4월 21일 |
느미 | 장미희 하명중 | 벙어리 여인에 대한 멜로드라마 | 1980년 6월 13일 |
반금련 | 이화시 신성일 | 1975년에 연출되었으며, 금지되었다가 1981년에 검열되어 개봉 | 1981년 3월 13일 |
'화녀82'' | 김지미 나영희 | 하녀 3부작의 마지막 작품 | 1982년 6월 26일 |
자유처녀 | 안소영 신성일 | 멜로드라마 | 1982년 10월 29일 |
바보사냥 | 엄심정 김성근 | 멜로드라마 | 1984년 12월 1일 |
육식동물 | 김성겸 노경신 | 사회 멜로드라마, "충녀"의 리메이크 | 1985년 3월 23일 |
죽어도 좋은 경험 | 윤여정 현길수 | 서로의 남편을 죽이려 모의하는 두 여인에 대한 멜로드라마 | 1990년 9월 28일 1995년 7월 21일 |
6. 수상
김기영 감독은 백상예술대상에서 영화 《충녀》로 감독상과 남우주연상을 받았다.[49] 청룡영화상에서는 《화녀 '82》로 감독상을 받았고,[49] 시체스 영화제에서는 같은 영화로 특별 언급 여우주연상을 받았다.[49]
7.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출생-사망 |
---|---|---|
배우자 | 김유봉 | 1928년/1929년 ~ 1998년 2월 5일 |
장남 | 김동원 | 1952년 ~ |
차남 | 김동양 | 1958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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